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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BOX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by 어느새그곳 201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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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 10점
이반 일리치.배리 샌더스 지음, 권루시안 옮김, 장지연 감수/문학동네
이반 일리치의 많은 책들이 그렇듯 『ABC, 민중의 마음이 문자가 되다』 역시 서양 중세 문학을 공부한 중세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배리 샌더스와 나눈 ‘우정 어린 대화의 산물’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봤을 때 그가 활동하던 문화교류문헌자료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독서와 토론을 바탕으로 왕성하게 책을 내던 1970년의 공동 작업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이 글을 쓴 목적이 “우리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다다른 것도 아니고 뭔가를 권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저 우리에게 새로운 이해를 안겨준 역사 그 자체를 묘사만 할 뿐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미래는 추측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두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바는 뚜렷하고 매우 울림이 크다. 우선 이들은 광범위하게 문자생활을 하는 상황에서 보면, 인류 앞에는 인식론적 단절을 가져온 두 개의 깊은 구렁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과거의 구술문화와 단절을 가져온 구렁, 다른 하나는 지금 우리 코앞에 와 있는, 문자를 정보의 조각처럼 여겨 읽기와 쓰기를 정보처리 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구렁이다. 두 저자는 이 위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밝히는 데 집중한다. 오늘날 문자는 강제적인 문자 교육 때문에 기능 문맹을 비롯한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음에도 한편으론 언어가 정보체제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막아주는 유일한 보루가 된 역설적 상황을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이 탐구는 두 가지 경로를 따라 이루어진다. 하나는 읽기의 궁극적 형태는 ‘글월을 묵상하는 것’이라는 생빅토르의 위그의 발견에서 출발하는 경로, 다른 하나는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수다쟁이 배스의 아내에서 마크 트웨인이 쓴 소설의 주인공이 허클베리 핀에 이르는 경로다. 다시 말하면, 이 대조적인 두 갈래 길이 하나는 침묵과 묵상에, 다른 하나는 수다와 거짓말에 각각 바쳐질 것이란 점을 알려준다. 

* 그럼, 이제 이 구도를 마음속에 새기고 각 장의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은 머리말을 빼고 모두 일곱 장―‘낱말과 역사’ ‘기억’ ‘글월’ ‘번역과 언어’ ‘자기’ ‘허위와 서술’ ‘교습되는 모어에서 새말과 꽥꽥일률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지막에 후기가 붙어 있다. ‘간추린 참고문헌’ 또한 본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톡톡히 하므로 그것까지 주의깊게 봐야 한다. 일리치와 샌더스가 밝힌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을 성찰해보자는 두번째 구렁에 관한 내용은 말미에 가서야 나온다. 먼 과거로부터 역사를 훑어오기에 생긴 당연한 결과다. 그에 이르기까지 중간중간 풍부한 고전학적 지식이 발휘되면서 시기별로 말의 동결화 과정, 말의 문자화 과정에 대한 묘사들이 감탄할 만큼 시적으로 펼쳐진다. 짧지만 아름답고 심오한 이 책이 일으키는 마음의 파문을 보려면 직접 책을 펼쳐 읽는 수밖에 없다.




알파벳의 발명 ― 구술 시대의 ‘날개 달린 말’을 붙잡다
첫번째 장 ‘낱말과 역사’에서 일리치와 샌더스는 알파벳 문자가 생겨나기 전에 말이 자취를 남길 수 있다는 관념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말을 인용해 역사 이전에 기예와 지식의 규칙이 아닌 신성한 열정과 깊은 감정에서 우러나 펼쳐지는 설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구술로 이루어지는 이 설화 시대에는 생각 자체가 날개를 타고 날아오른다. 이야기는 말과 분리될 수 없고 마치 날아가고 있는 새처럼 한곳에 있다가도 한순간 사라져버린다. 이야기꾼은 저만의 실타래를 자아내면서, 낱말 하나하나를 그대로 되풀이하는 일 없이, 끝없이 이어간다. 소리는 덧없이 사라지는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문자를 글로 적음으로써 소리를 그곳으로부터 구출해낸다. 그렇게 살아 있는 말은 필경사에 의해 해체된다. 필경사는 구술되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음미해 귀에는 들리지 않는 그 뿌리를 고찰해 점토판에 새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시뷜라 덕분에 고대 희랍인은 더이상 델포이의 퓌티아가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신탁을 알아듣고자 애써 귀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 시뷜라가 시간이라는 맥락 속에 들어 있는 말을 시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알파벳의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신탁을 하나의 문학 장르로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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